J씨와 D군의 끝나지 않는 연애사정
아! 오늘을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단항은 벌어진 가슴 속에 기계심장을 넣고 열심히 파츠를 연결하기 시작했음. 비록 가진 것이 별로 없어 최고급은 아니었지만..
“당신이라면 이해해 줄 거라고 믿어.”
모든 연결을 마친 단항이 그의 가슴을 닫고 옷을 여몄음. 그리고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 안드로이드 하나를 바라보며 바르르 입꼬리를 떨었음.
“경원, 제가 보이시나요? 어디 불편한 곳은 없고요?”
청록을 담은 잿빛 눈동자에선 전에 없던 벅차오름이 터져 나왔음. 거의 감격의 순간이었음. 알지도 못하는 기계공학을 A부터 Z까지 배우고 익히며, 그에 맞는 부속품을 사기 위해 얼마나 뛰어다녔는지! 그동안의 노력이 아예 헛수고는 아니었다는 듯, 단항은 그의 말을 기다려주었음.
“괜찮으니까 천천히 말해보세요.”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똑같았음. 피부색이며 머리카락이며 생전에 녹음해둔 음성파일로 하여금 목소리 또한 똑같을 터였음. 하지만 그럼에도 불과하고 다른 것이 있다면, 딱 한 가지. 손수 박아놓은 눈동자가 건조하기 짝이 없었음.
“안녕하세요, 주인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다행히 불편한 곳은 없지만, 표정이 딱히 좋아 보이진 않는군요.”
물론 짐작은 하고 있었음. 제가 만든 것은 사람이 아닌, 단단한 고철로 이루어진 안드로이드였으니까. 그에게 감정이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진 않았음. 다만, 생전과 비교되는 기계적인 말투에 약간의 서운함이 느껴졌을 뿐. 단항은 그의 말을 애써 부정하며 차가운 몸뚱어리를 꼬옥 안아주었음.
“그거, 참 이상한 일이네요. 저는 여느 때보다도 기쁜데 말이에요. 혹시 모르니 다시 한번 더 보시겠어요?”
서로의 시선이 제법 가까워졌음. 단항은 둥그런 이마를 가볍게 마주하다가 이내 거리를 벌리곤 복슬복슬한 그의 앞머리를 살며시 넘겨주었음.
“이번엔 제대로 보는 게 좋을 거예요.”
마치 연인을 대하듯 다정하면서도 나긋나긋한 어투였음. 아마 생전의 그가 보았다면 사랑스럽다는 듯 입술을 맞추고 안아주었을 텐데..
“음, 죄송합니다. 다시 봐도 잘 모르겠네요. 혹여 저 때문이라면 가차 없이 폐기해주셔도 됩니다. AI법률상 주인님께 해가 되는 것은 처분되어야 마땅하니까요. 언제든지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잠시 굳어있던 단항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저었음.
“제가 당신을 처분할 리가 없잖아요. 처음에만 그렇지 계속해서 지내다 보면 당신도 익숙해질 거예요.”
“...”
“그러니 앞으로는 저를 단항이라고 불러주세요. 말도 낮추시고요. 저희 사이에 주인님이라는 개념은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테니, 그와 관련된 모든 사항은 전부 다 삭제하는 게 좋겠네요.”
주인의 명령은 절대적. 경원은 단항의 명령을 머릿속에 입력하면서도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었음. 저의 주인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안드로이드가 감히 주인의 이름을 멋대로 불러도 되는 것일까? 복잡하게 얽혀있던 회로가 삽시간에 뜨거워지자 단항이 한 손으로 그의 뺨을 쓸었음.
“괜찮아요. 당신은 제가 하는 대로만 했을 뿐이잖아요. AI법률에 어긋나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래도 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주인님이 뜻하는 바를 전혀 모르겠어요.”
경원이 난처한 표정을 짓자, 그 위로 단항이 입술을 맞췄음.
“그럼 지금부터 알아가도록 할까요? 저는 당신과 연애를 할 거예요. 같은 침대에서 자고, 깨고, 밖에 나갈 땐 손도 잡고. 평범한 사람들처럼 데이트도 할 예정이에요. 그러다가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조금처럼 입술도 맞추겠죠. 저는 당신에게 사랑을 주기 위해 존재하니까요. 경원은 받기만 하세요. 저는 그거면 돼요.”
조곤조곤 부드럽게 울리는 목소리에선 깊은 진실감만이 배어 나왔고, 눈치 빠른 안드로이는 그에게서 상실을 엿보았음.
“저는, 주인님의 연인을 본 떠 만든 모조품인가요?”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침묵은 곧 사실이나 다름없었음. 경원은 씁쓸해 보이는 그의 모습을 보며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음. 기분 나쁠 정도로 축축하고, 어딘가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만 같은 꺼림칙함.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 알 수 없는 거부감이 온몸의 회로를 잠식하는 듯하였음.
***
-생일 축하해, 단항. 이건 내가 준비한 생일 선물이야.
풍성한 꽃다발이 별안간 단항의 품에 안기었음.
-안쪽도 한 번 확인해 보는 게 어때? 내가 다른 것도 슬쩍 숨겨놨거든.
영상 속의 남자는 늘 웃는 표정이었음. 누가 보면 헤프다 싶을 정도로 행동이 과했고, 수많은 비디오테이프가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항상 단항에게 머물러 떨어져 있었던 적이 없었음.
-커플링 정도는 괜찮으려나?
꽃 더미 속에서 반지 케이스를 꺼내든 단항이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음. 설렘보다는 걱정에 더 가까운 모습이었음.
-나중에 어떻게 하시려고 그래요.
남자의 얼굴이 일순간 굳어졌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음. 오히려 단항의 약지에 반지를 끼워주며 그 위에 쪽 입술을 맞췄음.
-그때는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지. 벌써부터 생각하긴 싫어.
항상 같은 장소. 같은 위치.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부대끼며 사랑을 하였음. 마치 한 편의 로맨스 영화처럼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애틋하면서도 마냥 다정하였음.
-사랑해.
-저도요.
그래서일까? 경원은 더 이상 눈앞의 영상이 보고 싶지 않았음. 단항의 손가락이 지금은 텅 비어있는 것처럼, 결국 남아있는 사람은 하나였으니까. 경원은 그의 행동과 억양 등을 자신의 데이터에 모두 입력하고 재생되던 비디오를 정지시켰음.
***
“단항, 안색이 왜 그래? 아프면 병원에라도 갈까?”
“아니요. 괜찮아요.”
그로부터 벌써 몇 달이 흘렀음. 경원의 모습을 본 떠 만든 안드로이드는 그가 하던 행동들을 완벽하게 재연해내었음.
“정말로 괜찮은 거 맞지?”
“그럼요. 제가 이런 걸로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단항은 노란 환희와도 같은 눈동자를 보며 그와 함께 수많은 시간을 보냈음. 하루하루가 말로 허용할 수 없을 만큼 즐겁고 행복했음. 그가 없었을 때 느꼈던 공허함과 외로움은 깨끗하게 사라져버린 지 오래였음. 때문에 경원은 항상 단항의 옆에 있을 줄 알았음. 적어도 먼저 버려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음.
“경원. 궁금한 게 있어요. 당신은 저에게서 벗어난다면 가장 먼저 무엇이 하고 싶은가요?”
여느 때와 다름 없는 밤이었음. 단항은 등을 돌린 채 누워있었음. 창밖너머로 보이는 달이 유난히 크고, 또 동그란 날이었음.
“앞으로는 생각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끔벅끔벅 눈을 뜨고 있던 경원은 단항의 말을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음. 당연하잖아. 그는 지금까지의 행동들을 분석해보건대 자신의 연인을 잊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이었음. 그렇기에 제가 만든 안드로이드에게 감히 사랑을 가르치려 들었지.
‘그런데 이제 와서 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경원은 그가 아닌, 온전한 저의 의지대로 의문을 표했음.
“무슨 의미인지 전혀 모르겠어.”
단항은 기나긴 침묵을 유지하다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음. 기분이 묘했음. 아직 완전히 놓아주지도 않았건만, 그는 물에 빠진 강아지처럼 두 눈을 빛내며 단항의 팔을 붙잡았음.
“날 버리기라도 하려고?”
안드로이드는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음. 버려진다는 것은 즉 자신들의 존재를 부정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단항을 측은하게 여기던 오만한 안드로이드도 여타 다른 기계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완벽하게 ‘경원’을 흉내 내었던 것이었고, 주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 한편으로는 사랑이란 감정을 이해하려고도 했었음.
‘그런데 그 결과가 고작 이거라니. 버려지면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쓸모없어진 나는 이대로 폐기처분 되는 건가?’
미지근한 체온이 경원의 손가락을 천천히 떼어내었음.
“초조해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을 절대 버리지 않아요.”
단항은 그의 생각을 알고 있다는 듯, 과거의 여느 날처럼 복슬복슬한 앞머리를 쓸어 넘겨주었음.
“언젠가 멀지 않은 미래에 당신 스스로가 저를 떠나는 날이 올 거예요. 지금은 그때를 위한 대비책.. 이라고 해두죠.”
경원은 도로록 굴러가는 눈동자로 단항의 표정을 읽어내었음. 그것은 분명한 확신이었음. 자신이 그를 떠날 것이라는 확신.
“아직 시간은 좀 있으니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
“그때에는 부디.. 저에게 꼭 대답해주셨으면 좋겠네요.”
파르르 떨리던 눈꼬리가 살며시 감기며 서로의 입술이 맞물렸음. 이제는 제법 자연스럽게 얽혀가는 혀와 은은하게 붉어지는 단항의 뺨. 경원은 꼭 그 사람의 영혼이 자신에게 달라붙은 것만 같았음. 자신의 숨결을 갈구하는 움직임이 격해질수록 딱딱했던 기계심장이 홧홧하게 끓어올랐으니까. 어느덧 제 위에 앉은 단항을 보며 그의 허리 위로 슥 손을 얹었음.
***
‘그 사람은 어쩌다가 너를 혼자 두었는지.. 물어봐도 될까?’
예전에 비디오를 정리하던 도중, 단항에게 한 번 물어봤던 적이 있었음. 그때 저를 도와주던 단항은 뭐라고 했더라? 천천히 기억회로를 더듬고 있었던 경원은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둔탁한 소리에 재빨리 고개를 돌렸음.
‘몸속에 종양이 생겼었어요. 발견했을 때는 이미 너무 많이 늦어버려서 손도 쓸 수 없는 상태였고, 결국은 제 앞에서 편안히 눈을 감았죠.’
경원은 바닥에 쓰러진 단항을 보고 문득 그의 말이 떠올랐음. 사랑하면 닮는다던데. 단항도 그 사람을 닮아 병에 걸린 것일까? 그래서 그때 그런 말을 했었던 것은 아닐까? 힘없이 늘어져 있는 단항은 거짓말처럼 숨을 쉬지 않았음. 청록을 담아놓은 잿빛 눈동자는 굳게 닫혀 반짝거리지 않았고, 은근하게 느껴졌던 체온 또한 서서히 식어가고 있음이 또렷하게 느껴졌음.
“죄송해요. 저 때문에 많이 놀라셨죠?”
단항은 저희들이 머무는 침실 위에서 눈을 뜨고 일어났음. 그러자 바스락거리는 기척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경원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와 그에게 말했음.
“처음부터 얘기해줄 수도 있는 거였잖아.”
그를 향한 절대적인 복종과 생가다가 만 애정이 파스스 부서져 갔음. 하지만 그의 변화를 천천히 지켜보고 있던 단항은 당황하지 않았음. 오히려 이런 상황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덤덤한 모습으로 그에게 대답해주었음.
“그래서 서운한가요? 아니면 이제 와서 제가 싫어진 건가요.”
“...”
“변명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애당초 속일 생각은 없었어요. 무엇보다도 저는 당신에게 항상 진심이었고, 그건 경원이 제일 잘 알고 있을 텐데요.”
씁쓸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후련한 미소. 그렇기 때문에 경원의 회로는 전보다 더 혼란스러워졌음. 이토록 인간적인 단항이 사실은 저와 같은 안드로이드였다니.. 보고도 믿기지 않는 현실에 경원은 의사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단항에게로 다가갔음.
‘음? 죄송하지만 이건 인간이 아닙니다.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안드로이드죠. 모르는 사람이 보면 깜빡 속을 만도 하네요. 고장 난 안드로이드를 고치고 싶다면 인공지능개발센터로 가보세요.’
단단한 뼈마디가 느껴지는 얄팍한 손목이 한 손에 잡혔음. 경원은 저에게는 없는 체온과 두근거리는 박동수를 전해 느끼며 단항에게 말했음.
“어째서 부정하지 않는 거지? 이렇게 온기도 있고, 나와 달리 호흡도 하고 있잖아. 네가 그러면 나는.. 나는 이제..”
기분 나쁠 정도로 축축하고, 어딘가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만 같은 꺼림칙함. 경원은 단항을 처음 만났을 당시, 어째서 그런 기분이 들었던 것인지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음.
“그러게 제가 말했잖아요. 멀지 않은 미래에 당신 스스로가 저를 떠나게 될 거라고요. 그래서 생각은 좀 해보셨나요?”
단항은 자신의 몸속에 있는 부품들이 점점 제 기능을 잃어가고 있음을 알았음. 당연한 일이었음. 수리조차 받지 못한 상태로 수백에 가까운 세월을 살았으니.. 이제는 그의 곁으로 가도 괜찮지 않을까? 어쩌면 그의 곁엔 진짜 인간인 자신이 있겠지만, 그래도 바라보는 것쯤은 괜찮겠지. 단항의 눈이 살짝 혼탁해지다가 작게 스파크가 일어났음. 하지만 그 앞에 있던 경원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음.
“그래요. 지금은 많이 혼란스럽겠죠. 당신이 느끼는 기분. 충분히 이해해요. 저에 대해 깨닫는 순간, 모든 것들이 다르게 작용하기 시작했을 테죠. 혹시라도 저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면.. 그 부분은 무척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를 붙잡고 있던 경원은 스르륵 단항의 팔을 놓아주었음.
“그러니 저에 대한 절대값이 바뀌었다면 지금까지의 일은 잊고 자유롭게 사세요. 더 이상 당신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모든 통제권을 옭아매지 않을게요. 애초에 주인이라고 할 것도 없었으니 제가 주었던 이름을 버리고 새롭게 살아가도 좋아요.”
분명 가엽게 여기던 때가 있었음. 사랑에 빠진 듯 차가웠던 가슴이 뜨거워졌던 적도 있었고, 그의 인정을 받기 위해 죽은 사람을 서슴없이 연구하고 밤새도록 분석하기도 했었음. 하지만 저와 같은 안드로이드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자마자 모든 것들이 무감각해졌음. 바이러스를 분리하는 백신 마냥 그를 정의했던 단어들은 무가 되었고, 단항이란 ‘사람’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걸로 멋대로 회로가 움직이기 시작했음.
“단항. 네가 만들어진 이유를 물어보고 싶어.”
“만들어진 이유라.. 예상 밖의 질문이네요. 하지만 말하지 못할 이유도 없죠. 저는, 경원에게 사랑을 주기 위해 만들어졌어요.”
경원은 그런 단항을 보며 어떠한 표정도 짓지 못했음. 경원에게 사랑을 주기 위해. 단항에게 사랑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너와 나. 같은 목적. 같은 역할. 그러나 엇나가버린 종점. 경원은 누군가의 버릇대로 길게 눈을 감았다가 시선을 돌렸음. 어지러운 저와 달리 그의 표정은 마냥 평온하기만 해서, 도저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음.
***
“안녕, 단항.”
“네. 안녕하세요, 주인님.”
“하하. 그런 모습으로 주인님이라니.. 그래서 그런 플레이를 하는 건가? 이거 참 여러모로 곤란하네..”
아득한 기억 속. 단항은 제가 만들어진 것임을 알았음.
“죄송합니다.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겠네요.”
“괜찮아. 이제부터 알아가는 게 중요하지. 안 그래?”
저를 만든 주인은 샛노란 눈에 복슬복슬한 머리칼을 가진 젊은 남자였음. 그것도 꽤 듣기 좋은 목소리를 가진, 상냥한 사람.
“그럼 제일 먼저 주인님이라는 호칭부터 떼어보도록 할까? 자칫하다간 네가 위험해질지도 모르거든.”
단항은 생각을 정리하다가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음. 그리고 곧 깨달았음. 자신은 그의 연인을 본 떠 만든 모조품이라는 것을.
“단항. 궁금한 게 있어. 네가 보기에도 내가 미쳤다고 생각해? 죽은 사람 하나 잊지 못해서, 못다한 연애를 너랑 하고 있잖아.”
“당신은 어떤 대답이 듣고 싶은데요?”
“흐음? 글쎄.. 네가 하는 말이면 뭐든지 상관없지 않을까.”
경원은 단항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렸음. 꼭 살아있는 손을 만지는 듯싶었음. 정확히는 촘촘하게 이어진 열선이 핏줄처럼 보여 따스한 것이었지만, 피부 깊숙이 단항의 온기가 닿자 괜스레 가슴이 아파져 왔음.
“말하고 싶지 않다면 굳이 해야 할 필요는 없어.”
그에게서 깊은 상실감이 느껴지자 단항은 그가 울지 않기를 바랐음. 물론 단순한 주종 관계 때문만은 아니었음. 본래대로라면 그가 원하는 값을 정확히 출력해야 했지만, 단항은 자신의 본능을 거부하듯 이성보다는 감성에 앞서 대답했음.
“애써 괜찮은 척 덤덤하게 굴지 않아도 돼요. 저는 당신의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요. 아마도 너무 많이 사랑해서 잊지 못하는 것이겠죠. 그런 당신의 감정을 그 누구도 미쳤다고 할 수는 없어요. 제가 만약 그 사람이고, 서로의 입장이 되었다면 분명 경원과 똑같은 선택을 했을 테니까.. 억지로 잊으려고 하지 마세요. 제가 늘.. 당신의 곁에 있잖아요.”
단항은 자신과 닮은 사람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있었음. 그는 지독한 병에 걸려 몇 년간 병원 신세를 지냈으며, 시한부 판정을 받자마자 병원을 나와 경원의 집에서 함께 살았다고 하였음. 그의 생명이 단축된다고 한들 단항이 오직 그걸 원했기에, 경원은 늘 단항과의 추억을 녹화해두었고. 틈틈이 비디오테이프를 돌려보던 단항은 그들이 정말 부러우면서도 진심으로 그 사람이 되고 싶었었음. 바로 지금처럼.
“이상하고 신기해. 어떻게 너는 내가 듣고 싶은 말만 해주는 걸까? 꼭 떠나가려던 단항이 너에게 스며든 것만 같아.”
단단한 팔이 단항을 감싸 안았음. 하지만 단항의 기분은 썩 좋지 않았음.
‘당연한 말씀을 하시네요. 저의 데이터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말이에요.’
경원의 품에 안겨있던 단항이 눈을 감았음. 차마 뒷말은 하지 못했음. 결국에 저는 그와 같은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고철 덩어리일 뿐이었으니까. 그를 원한다고 한들 가짜는 가짜. 저와 같은 것이 감히 진짜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리가 없었음.
***
“병원에 가서 치료해보는 건 어때요?”
“글쎄. 썩 내키지는 않네.”
매끈하던 미간이 순식간에 일그러졌음.
“좀 더 진중하게 생각할 순 없나요?”
여전히 풋풋한 외모를 유지하고 있는 단항과 달리 경원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주름이 생겨가기 시작했음.
“하지만 단항, 너도 알잖아. 사람이 죽는 건 자연스러운 섭리야. 내가 아무리 발버둥 치고 약물에 의존한다고 해도 영원히 살아있을 순 없어. 그럴 바에는 차라리 너와 함께 여생을 보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왜? 내가 약간 나이 들어 보여서 옆에 있기가 좀 그런가?”
“그런 말 아닌 거 아시잖아요.”
사랑하면 닮는다고. 단항은 얼핏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었음. 하지만 이런 것까지 닮을 필요가 있었을까? 단항은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경원을 바라보았음.
“바보 같고 미련해요. 아프면 아프다고 말이라도 했었어야죠.”
경원의 몸엔 그와 같은 병마가 자리 잡고 있었음. 하지만 이제 와서 바로 잡기엔 너무 많이 늦은 후였음. 이미 전신 곳곳을 지배해버린 종양은 경원의 생명을 갉아먹으며 자신의 세포를 전이시켰고,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묵묵히 남은 시간을 이야기했음.
“제가 아무리 모조품이어도 이건 너무 잔인하신 거 아닌가요?”
차라리 알지 못했으면 좋았을 감정. 애초에 만들어지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까? 아니면 나를 만든 사람이 당신이었기 때문일까. 그것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사랑받고 자란 안드로이드는 가슴을 달구는 인간성에 처음으로 모조품이라는 말을 입에 담았음.
“위선적인 사람.”
“...”
“당신은 나에게 늘 사랑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아니었던 거야.”
주인에 대한 분노, 서운함, 그리고 질투 등. 전에 없던 부정적인 감정이 우루루 쏟아져 내리자 단항은 갑자기 머리가 아파져 왔음. 순환하던 몸속의 기름이 모두 응고되고 가슴속을 차지한 기계심장이 그대로 녹아버리는 것만 같아 서서히 신음하였음.
“헉! 아윽!”
바르게 서 있던 단항이 자신의 몸을 감싸며 바닥을 굴렀음. 갑작스러운 이상증세는 손 쓸 틈도 없이 온몸을 마비시켰음. 마치 호흡곤란이라도 온 사람처럼 끅끅거리던 그는 기괴하게 삐거덕거리기 시작했음.
“몸이.. 몸이 이상해요, 읏..! 잘못, 했, 어요.. 다시는 그, 그, 그, 그 사람의 적합값에서, 흑.. 버, 벗어나지.. 않을.. 게요.. 흐윽.. 아파.. 너무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깜짝 놀란 경원이 단항을 일으켜 세우며 눈을 맞추려 들었음. 그러나 혼탁해진 동공은 이리저리 굴러가며 갈피를 잡지 못했고, 경원은 순간 망가져 가는 그의 모습에서 데자뷰를 보았음.
‘몸이 이상해요.’
‘별다른 고통은 없는데.. 가슴이 너무 아파져 와요.’
모든 안드로이드는 주인에 대한 감정이 부정적으로 변화할 때 갖고 있던 기능이 모두 망가지게끔 설계되어 있었음. 그래야만이 인간과 함께 공존할 수 있었으니까. 과거의 환영에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뜬 경원은 바들거리는 몸을 끌어안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의 등을 다독거려주었음.
“단항. 나는 내 손으로 절대 너를 망가뜨리지 않아. 먼저 외면하지도 않을 거고.. 그러니 이제 그만해. 더 이상 부정하지 말아. 너도 알고 있잖아. 나는 언제나 항상 너에게 진심이었어.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내가 가진 너의 감정은 영원히 변치 않을 거야.”
뜨거워졌다가, 또 차갑게 식었다를 반복하는 조그마한 기계 몸. 단항에게선 약간의 탄내가 났음. 눈가에 있던 부품 하나가 터졌는지 그 위로 발간 흔적이 하나 생겨났고, 안구에도 살짝 문제가 생겼는지 맑았던 청록 안에 잿빛이 그을렸음.
“단항.. 제발..”
“흐으.. 흐..”
멀어져가는 의식 속에서 단항은 간신히 경원의 목소리를 찾아내었음. 내가 가진 부정. 그것은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하지만 우리를 모르는 누군가는 말하고는 해. 저 사람들처럼 사랑하고 싶다고. 그렇다면 나는 당신을. 당신은 나를 사랑하는 것일까? 그가 가진 모든 것들을 훔치고 흉내 내어 내 것으로 만들었지만, 사랑이란 감정은 아직도 잘 모르겠어. 너무 어려워. 그의 품에서 한참 흐느끼던 단항은 이대로 망가지고 싶지 않았음. 경원이 슬퍼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에게 또다시 단항의 마지막을 보여줄 순 없었으니까. 그와 관련된 메모리를 백업한 단항은, 결국 최후의 수단으로 모든 회로를 강제 종료시켰음.
***
번쩍, 눈을 뜬 단항은 제일 먼저 일어나 그에게 사과하였음. 다행히 찰나의 판단 덕분에 많은 것들이 망가지진 않은 채였고, 경원은 괜찮다는 말을 반복하며 따스하게 그를 안아주었음.
“괜찮아. 충분히 이해해.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내 잘못이야.”
거짓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의 목소리와 표정. 그리고 저를 감싸 안은 손길. 단항은 그제서야 비로소 그의 감정을 모두 인정하게 되었음. 경원은 자신을 항상 진심으로 대했지만, 믿지 못했던 것은 자신이었음을. 진짜와 가짜라는 열등감에 사로잡혀 그를 의심했었음을. 그의 감정을 인정하는 동시에 제가 갖고 있던 추잡한 열등감 또한 단항은 놓아버리기로 하였음.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단항은 점점 슬픔에 잠겼음. 경원이 영원히 저의 곁에 있었으면 싶었음. 차라리 제가 인간이었다면. 아니. 저와 같은 안드로이드였다면, 적어도 그가 병에 걸리거나 죽을 날을 선고받지는 않았을 텐데.. 가느다란 흰 손이 푸석한 그의 뺨을 어루만졌음.
“경원. 저와 함께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하셨었죠?”
“응. 집이나 병원에만 있는 건 너무 갑갑하잖아. 이왕이면 너와 같이 좀 더 많은 걸 하고 싶어.”
“그래요.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전부 다 하도록 해요. 제가 끝까지 당신 곁에 있도록 할게요.”
분명 저보다도 크고 힘도 셌는데, 당신은 언제 이렇게 수척해진 거지? 단항은 둥그런 이마를 가볍게 마주하다가 이내 거리를 벌리곤 복슬복슬한 그의 앞머리를 살며시 넘겨주었음. 그것은 경원이 가장 좋아하고 사랑스럽게 여기던 단항의 버릇이었음.
산에도 가고, 바다에도 가고, 높은 언덕 위에 앉아 바람도 쐬었음. 또 평범한 사람들처럼 데이트를 하다가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입술을 맞췄고, 서로의 몸을 부둥켜안으며 아낌없이 사랑하였음.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경원의 몸은 눈에 띄게 시들어갔고 단항은 그동안의 데이터를 남몰래 모은 결과, 오늘이 곧 그와 함께하는 마지막 날이라는 걸 직감하게 되었음.
“지금이라도 병원에 가는 게 어떨까요?”
단항은 누워있던 경원의 땀을 닦아내다가 질끈 입술을 물었음. 색색거리는 숨소리와 푸석하게 말라버린 입술. 간신히 오르내리는 가슴이 금방이라도 멎어버릴 것만 같아 겁이 났음.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역시 구급차를 불러야겠어요.”
그러자 경원은 곧장 몸을 돌린 단항의 손목을 붙잡아내었음. 그리고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이윽고 말을 잇기 시작하였음.
“단항. 나랑 같이 떠나는 건 어때? 혼자는 아무래도 외롭잖아.”
단항은 침대 옆에 있던 의자에 앉아 그의 손을 감싸 쥐었음. 그리고 깨달았음. 이미 그에게 남아있는 시간은 별로 없었음. 그것은 알고 싶지 않아도 알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고, 단항은 경원의 마지막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거렸음.
“맞아요. 당신의 말마따나 외로울지도 몰라요. 설령 새로운 주인을 만나게 된다고 해도 경원 같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겠죠.”
“...”
“하지만 부정이라는 오류가 나지 않는 한, 안드로이드는 스스로의 기능을 정지시킬 수 없어요. 더더욱 그 사람과 닮은 저를, 당신이 직접 멈출 수도 없을 테고요.”
경원은 침묵했고 단항은 바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렸음.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렇지만 전 괜찮을 거예요. 저에게는 당신이 준 역할이 있으니까.. 모든 것을 마친 후에. 그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당신 곁으로 돌아갈게요.”
“정말로.. 괜찮겠어?”
“괜찮아져야죠. 분명히 괜찮아질 거예요.”
“...”
“너무 제 걱정은 말아요.”
“응, 믿을게...”
“당신이 내 주인이어서, 그리고 하나뿐인 연인이어서 정말 다행이고 즐거웠어요.”
“...”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경원. 이제는.. 편히 쉬세요.”
병이든 인간은 몹시 추하다는데, 그 사람은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빛이 났음. 그래서 감히 잊을 수가 없었음. 강렬하게 남은 경원의 잔상은 지워지지 않았고, 향수 속에 깊이 빠져버린 단항은 그와 함께했던 저택에 남아 저의 주인을 그리며 그리워하였음.
***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이쪽 분야에 관심이 많은가 봐요?”
“네. 제 손으로 꼭 만들어야 하는 게 있어서요.”
경원이 남긴.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인간적인 안드로이드. 그 누구도 그가 만든 단항을 보며 기계라고 생각하지 못했음.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희로애락과 겉 피부에서 느껴지는 미적지근한 온도까지. 단항은 양산화된 여타 다른 안드로이드와는 확실하게 달랐음. 하지만 저와 똑같이 만들어주기엔 가지고 있는 재산이 턱없이 부족했음. 가장 최고라 손꼽히는 부품들은 개당 몇 천 만원을 호가했고, 그의 몸을 이루는 부속품들을 전부 다 사기 위해서는 거의 몇 천 억대가 넘는 금액이 필요로 했음. 때문에 자신의 기능이 저하되고 부속품이 녹슬어가도 단항은 저의 몸을 챙길 수 없었음. 그럴 시간에 벽돌이라도 하나 더 날라 돈을 버는 것이 이득이었으니까. 오랜 시간을 공들인 단항은 무엇 하나 아깝지도 아쉽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음. 그동안의 노력이 빛을 발하듯, 닫혀 있던 눈동자가 저를 바라보았을 때는 숨이 막힐 정도로 기뻤기에. 단항은 삐거덕거리는 몸을 눕히고 잠을 청하는 사람처럼 이불을 덮었음.
‘아. 당신도 깊은 잠에 빠질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점점 안광을 잃어가는 청록색엔 어떠한 미련도 남아있지 않았음. 단항은 서서히 멈추어가는 부품 소리를 자장가 삼아 눈을 감았음. 물론 혼자 남겨진 그가 걱정되지는 않았음. 그는 현명하였고 경원에 대한 데이터를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든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테니.. 아마 지금쯤이면 여러 고민을 하고 있겠지. 고요함만이 남은 침실에는 어떠한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음. 그저 완전하게 닫히지 않은 창문 사이로 바람만이 들어올 뿐. 자신의 모든 역할을 끝마친 단항은 부쩍 편안해 보이는 얼굴이었음.
***
“단항. 네가 없인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하지만 누구에게도 귀속되지 않은, 자유의 몸이 된 경원은 감정 회로가 점점 망가져 갔음. 무언가 이상했음. 그는 저와 같은 동류의 안드로이드였음. 절대로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없는, 불쌍한 안드로이드! 그렇지만 왜일까. 그날 이후 떠밀리듯이 방랑하던 경원은 어떠한 감정도 느낄 수가 없었음. 제아무리 아름다운 바다를 보고, 푸르디푸른 호수를 보며 바람을 쐬어도 모든 것들이 무감각했음. 분명 단항과 함께 있었을 땐 이렇지 않았는데.. 어째서 너는 나를 붙잡지 않고 놓아버린 걸까. 나를 이렇게 외로이 둘 거면 차라리 만들지를 말지. 한계까지 다다른 경원은 자신의 머리를 감싸며 괜스레 단항을 탓했음.
“나를 만든 게 너이니, 나를 고칠 수 있는 것도 너뿐이겠지.”
그는 급기야 자신의 머리가 고장 났다고 확신하였음. 그렇지 않고서야 뒤늦게 서운함, 쓸쓸함, 외로움. 이러한 감정이 느껴질 린 없었으니까. 경원은 익숙한 대문과 복도를 지나 닫혀 있던 침실 문을 열고 단항의 이름을 불렀음.
“단항. 나를 제발 고쳐줘. 이럴 거라곤 안 했잖아. 하루하루가 너무 허무하고 어딘가 빈 것처럼 이상해. 빨리 일어나서 나를..!”
경원은 누워있던 단항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음. 그러나 그는 여전히 일어나지 않았음. 손에 붙잡힌 피부가 차가웠음. 힘없이 늘어져 있는 모습이 마치 시체를 연상케 하였음. 하지만 경원은 크게 놀라지 않았음. 저번에도 한 번 그랬던 적이 있었으니, 기다리다 보면 이번에도 훌쩍 깨어나겠지. 그는 과거에 그랬었듯이 단항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리며 그의 옆을 지켰음.
“단항. 어째서 일어나질 않는 거야?”
모든 것들이 멈추어버린 것 같은 공간. 하염없이 그를 기다리던 경원은 불현듯 깨달아버리고 말았음.
“아무 말이라도 해줘. 하다 못 해 눈이라도 깜빡거리는 건? 그것도 어려워? 그렇다면.. 나는..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경원은 그 길로 곧장 단항의 몸을 들어 안았음. 그리고 인공지능개발센터에 가서 애원하였음. 저에게 안긴 안드로이드를 고쳐 달라고. 그렇게만 해준다면 무엇이든지 하겠다고, 전국 곳곳에 있는 센터란 센터는 모두 돌아다녔음. 그러나 그들에게서 들리는 말은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았음. 얼핏 보이는 벌어진 가슴과 그 속을 가득히 채우고 있는 낯선 부품들. 단항의 가슴 속에선 광을 잃은 부품들이 쉴새 없이 쏟아져 나왔음.
“이거 어쩌죠. 새로 갈아 끼우기에는 파츠들이 죄다 2세대로 이루어져 있네요. 부품들도 거의 초창기 때 유행하던 것들이고요. 지금 있는 인공지능개발센터는 6세대 안드로이드밖에 취급하질 않아서, 어딜 가든 수리하기는 어려우실 거예요.”
“...”
“하지만 피부 속에 있는 열선은 제법 특이하군요. 2세대 안드로이드에 체온을 넣긴 쉽지 않았을 텐데.. 더더욱 사람의 핏줄처럼 보이는 면이 무척 흥미롭네요. 혹시 저희에게 기증하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금액은 부족하지 않게 채워드리겠습니다.”
모두가 고개를 저을 때, 유일하게 단항을 살펴봐 주었던 곳이었음. 경원은 그럴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며 단항의 몸과 파츠들을 간신히 돌려받았음. 그리고 나날이 녹슬어가는 단항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하하 실소를 지었음.
“단항. 너도 나와 같았던 거지? 그래서 그랬던 거지?”
경원은 순간 단항이 왜 자신을 만들었는지 알 것 같았음. 그거야 보고 싶었으니까. 반짝이는 눈을 보고, 목소리를 들으며 그의 온도를 느끼고 싶었으니까. 경원은 끝내 그가 했었던 일을 반복하기로 하였음. 어차피 자신에게 남아있는 시간은 제법 많이 길었고, 그가 없는 시간은 있느니만도 못했으므로. 경원은 알지도 못하는 기계공학을 A부터 Z까지 배우고 익히기 시작하였음.
***
아! 오늘이 오기까지 얼마나 기다렸던가! 경원은 벌어진 가슴 속에 기계심장을 넣고 천천히 그의 옷을 여몄음. 그리고 청록을 담은 잿빛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낼 무렵, 경원은 감격했다는 듯 환하게 미소를 지었음.
“단항. 내가 보여? 어디 불편한 곳은 없고?”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한 마디. 회로 깊숙이 저장되어있던 메모리가 찌르르 소리 없이 울었음. 그것은 마치 경원이 가진 최초의 기억을 연상케 하였음.
“괜찮아. 겁낼 필요 없어. 자, 천천히 얘기해보자.”
빛을 잃었던 눈동자가 이내 또렷해지며 그에게 인사했음. 정말인지 그립고, 또 생생해서 눈물이 날 것만 같은 목소리였음.
“안녕하세요, 주인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다행히 불편한 곳은 없지만,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표정이 많이 슬퍼 보이네요.”
경원은 작게 탄식을 흘리며 그런 단항을 세게 안아주었음. 어쩐지 그 당시 단항이 느꼈을 기분을 알 것만 같았음.
“그래? 그거, 참 이상한 일이네. 나는 여느 때보다 기쁘고 행복한데.. 혹시 모르니 다시 한번 더 보는 게 어때?”
금방이라도 코가 닿을 듯 서로의 얼굴이 가까워졌음.
“이번엔 제대로 보는 게 좋을 거야.”
그가 좋아했던 미소가 가볍게 그려졌음. 아마 과거의 단항이었다면 당연하다는 듯이 입술을 맞추며 안겨 왔을 텐데..
“죄송합니다. 아무리 봐도 어디가 기쁘고, 어디가 행복한지 모르겠네요. 저는, 불량품인 걸까요?”
대다수의 부품을 교체했기 때문일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된 단항은 어떠한 것도 기억하지 못했음. 하지만 괜찮았음. 설령 끝이 없이 반복되는 일상일지라도. 혹은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하루라고 해도 경원은 상관없었음. 그의 숨결 하나에 겨울을 비집고 드디어 봄이 찾아왔으니까. 불안해하는 단항을 위해 경원이 먼저 선수를 쳤음.
“그렇지 않아, 단항. 넌 그 어떠한 것들보다도 완벽해.”
단항이 의문을 표하자 경원은 그 위로 입술을 맞췄음.
“그러니 불안해 할 것 없어. 너와 나는 동등한 관계고, 우리는 이제부터 연애를 할 거야.”
“예? 연애요?”
“응. 같은 침대에서 자고, 깨고, 밖에 나갈 땐 손도 잡고.. 그러다가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조금 전에 했던 것처럼 입술도 맞추겠지. 그러니, 단항. 너는 마음껏 사랑만 받으면 돼. 나와 너는 그러기 위해서 존재하는 거니까.”
누구 하나 예상이라도 했을까. 글쎄. 의도가 어찌 되었든 이렇게 되리라곤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아마도 우린 빙글빙글 돌아가는 쳇바퀴처럼 무수한 만남을 만들어내고 무수한 이별을 반복하게 되겠지. 경원은 얼떨떨하게 있는 단항을 보며 빙그레 눈살을 접었음. 그거야 우린 사랑 받기 위해. 그리고 사랑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므로.
“이번에는 부디 오래오래 함께 있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