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월 86 지역 각 지명의 뜻과 함께 개인적인 해석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휴~ 시원하다...
마지막 지역에 대한 언급도 있으니 메인퀘를 모두 밀고 읽는 걸 추천드립니다!!
엘피스의 각 지명은 고대 그리스어(=희랍어)로 지어져 있고, 해당 지역 npc의 이름도 고대 그리스식 이름입니다. 정체가 밝혀진 아씨엔들의 고대인 시절 이름도 그리스 신화 신들의 이름에서 따왔고요. 이번 효월에서 핵심적인 개념으로 등장하는 '뒤나미스'나 '엘피스'도 모두 고대 그리스어 단어입니다. 갈레말 제국이 로마제국의 모습과 라틴어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고대세계는 고대 그리스-고대 그리스어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스토리 상 종말의 진상이 밝혀지는 아주 중요한 지역이기도 한데, 지도의 각 지명에 꽤나 생각해볼 만한 부분이 많아서 개인적인 해석을 덧붙이게 되었습니다. (사전적인 의미 외에는 주관적인 생각일 뿐이므로, 재미로 읽어주세요!)
1. 각 섬의 이름
프로필라이온(현관)을 통해 들어서면 엘피스의 남쪽에 "노토스의 감탄", 서쪽에 "제피로스의 갈채", 북쪽에 "보레아스의 무언극", 동쪽에 "에우로스의 냉소" 섬이 각각 위치합니다.
그리스 신화 상 노토스, 제피로스, 보레아스, 에우로스는 각각 남풍, 서풍, 북풍, 동풍의 신이면서, 그 자체로 방위를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보레아스(Βορέας)는 북풍의 신의 이름이면서 그 자체로 북풍과 북쪽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맵의 이름을 보고 혹시나 했는데 역시 각 이름에 맞는 위치에 섬이 들어서 있습니다. 이런 디테일 굿~
2. 레테 해
탐험수첩 발췌: "충분한 검토를 거쳐 세상에 내보내지 않기로 결정된 창조 생물은, 이 샘에서 마법적으로 생명이 '해제'된 후 명계로 보내진다. 엘피스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슬픈 장소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 신화에는 망자가 저승(=명계)으로 가려면 네 개의 강을 건녀야 한다고 합니다. 그 중 하나가 '망각의 강' 레테입니다. 이 강을 건너면서 망자는 생전의 기억을 모두 잊어버리고 새 영혼으로 태어나게 됩니다. 신화와 비슷하게, 처분이 결정된 엘피스의 창조생물들도 이곳에서 이번 생의 기억을 모두 잊고, 에테르의 형태로 해체됐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생물로 태어나거나, 세상을 구성하는 에테르로서 비가 되고 바람이 되거나 했겠죠... 고대인들에게 이렇게 '에테르로 돌아가는 것'은 현재의 인간이 생각하는 죽음처럼 슬프고 두려운 일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헤르메스 같은 별종(일반적인 고대인 입장에서)이 있긴 했지만요.
3. 휘페르보레아 조물원
휘페르보레아(hyperborea)는 희랍어 hyper(~너머에, ~멀리)+borea(북쪽)가 합쳐진 말로 극북 내지는 북쪽의 끝이라는 뜻입니다. 휘페르보레아 조물원은 그 이름처럼 북쪽의 섬 "보레아스의 무언극"에서도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휘페르보레아'라는 말은 고대에 '알려진 범위를 벗어난 미지의 지역'을 가리키는 하나의 관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라틴어에도 이와 같은 의미를 가지는 단어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울티마 툴레(Ultima Thule)'입니다. 띠용~ '휘페르보레아'나 '울티마 툴레'나 둘 다 사전적인 의미는 '극북의 땅'이며, 고대와 중세에 '인간이 모르는 아주 먼 지역'을 뜻하는 말로 쓰였습니다. 휘페르보레아의 라틴어 버전이 울티마 툴레고, 울티마 툴레의 희랍어 버전이 휘페르보레아인 셈입니다.
별들의 절망을 듣고 흑화해버린 메테이온이 '휘페르보레아 조물원'에서 날아가 우주 먼 곳, 미지의 '울티마 툴레'에 둥지를 틀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매우 의미심장한 이름이 아닐 수 없습니다...
4. 아나그노리시스, 페리페테이아, 메타바시스
창조생물의 운명을 결정짓는 엘피스의 중추기관 휘페르보레아 조물원. 엘피스에는 그밖에도 조물원의 부속시설에 해당하는 곳이 있으니 바로 아나그노리시스 천측원, 페리페테이아 결정 자료관, 메타바시스 해양원입니다. 의미심장하게도 이 세 단어는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비극의 플롯을 구성하는 요소로 언급되는 단어들입니다.
- 아나그노리시스(ἀναγνώρισις): 인지, 발견(사전적인 뜻으로, 엘피스 지역 탐험수첩에서도 이런 뜻이라고 소개합니다). <시학>에서는 '비극의 주인공이 어떤 사실을 인지, 또는 발견함으로서, 비극적인 결말에 이르게 되는 계기'입니다. 그리스 비극에 자주 등장하는, '용사가 어느 나라의 왕을 쳐죽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왕이 그의 생부였다' 식 전개가 전형적인 예시입니다. 차라리 모르고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극은 본격적으로 비극으로 치닫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알게 됨으로써 비극에 빠진다", 성경의 선악과와 낙원추방 서사가 생각나지 않나요? 엘피스 남쪽에는 '지성의 과수'라는 섬이 있습니다. '지성의 과수'... 선악과네요. 이곳은 뱀으로 상징되는 헤르메스가 생명의 의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메테이온들을 날려보낸 장소입니다. '뱀'이 '지성의 과수'인 선악과를 먹고,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을 진실... 앞서 걸어간 별들은 빠짐없이 멸망을 맞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사건을 계기로 고대세계는 종말을 맞고, 인간은 더이상 낙원에서 살아갈 수 없게 되고요... 그런 점에서 아나그노리시스 천측원이라는 이름은 헤르메스의 극적인 태도 변화와 비극적인 결말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 페리페테이아(περιπέτεια): 반전/ 메타바시스(μετάβασις): 전환, 전환점. 둘 다 플롯의 반전이나 전환점을 뜻하는 말입니다. 주인공에게 아나그노리시스(인지)가 일어나면, 그것을 계기로 극은 페리페테이아(반전)을 맞아 메타바시스(전환점)에 이르게 됩니다.
빛전과 베네스는 헤르메스와 메테이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알아내기 위해서 페리페테이아 결정 보관원-메타바시스 해양원을 조사하게 됩니다. 이곳에서의 조사를 토대로 헤르메스가 '지성의 과수' 섬에서 무엇을 한 건지, 무슨 목적으로 메테이온들을 날려보냈는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메테이온이 보고를 거부한 채 도망치고, 메테이온을 추적하고, 변신한 헤르메스를 뒤쫓아 조물원으로 돌입하는 대환장 반전과 급전개가 이어집니다... 페리페테이아와 메타바시스라는 이름 자체가, 고대에 일어난 이야기의 반전, 또는 전환점에 다다랐다는 은근한 신호로 느껴지네요. 이제 종말이라는 비극은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엘피스는 여러모로 많은 은유와 암시를 보여주는 지역인 것 같습니다. 뒤나미스와 엔텔레케이아를 차용해온 점도 재미있고... 하여튼 생각할 게 많아서 하나씩 뜯어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