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톨비 단편))
-G25까지의 네타가 있습니다.
-성소에서 기도를 올리는 톨비쉬를 만난 밀레시안
-가내밀레시안의 캐릭터/설정이 확고한 편입니다.
-종교에 관한 이야기/신성모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이란 감정은 사람을 변하게 만든다고 한다.
물론 변하게 만든다, 라는 말은 서정적인 표현일 것이다. 사랑은 사람을 바보천치, 머저리로 만든다— 라는 말을 매우 순화시켜 듣는 이가 상처 입지 않도록 최대한 둥글게 표현한 것이 저 단어겠지. 타인과 나. 절대로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인간과 인간과의 사이에서 순수한 열정을 바친다는 그 어리석음을 사랑이란 간단한 두 글자로 대체한다니. 어찌 되었든 그럼에도 사랑은 사랑이어서, 그 감정에 스스로의 몸을 기어코 내던져 불사르는 행동을 사람들은 비난하고 싶지 않았기에 저런 문장이 태어난 것이리라.
그런 사람들의 아둔함에 자신은 코웃음을 쳤다.
정확히는, 이전의 자신이었다면 코웃음을 쳤을 말이었지만.
"그랬을 테지만, 말이지."
아무도— 정확히는, 주위에 다른 인간은 없으니 혼잣말이라 해도 무방한 말을 태연자약하게 읊조리며 헛웃음을 흘린다.
이전의 자신이었으면 근처에도 가지 않았을 성역에 알반 엘베드의 첫해가 지평선 위로 올라오기 전부터 가고. 이전의 자신이었다면 이미 다림질도 칼처럼 각을 잡아 바르게 해놓았을 옷이 괜스레 구겨진 것 같아 재정비하듯 다듬어보며. 이전의 자신이었으면 스스로의 말이 우습게 들리지 않을까 잠시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그에게 건넬 인사를 가다듬는다.
그래, 이전의 자신이었다면 하지 않았을 행동들.
아, 인간이란 감정 하나에 어찌도 이리 농락당하는지. 거짓 없이 제 모습을 비추는 손거울 앞에서 몇 번이고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도, 옷의 깃을 확인해도 바뀌는 것은 없다. 이미 완벽한 —그리고 이것은 자화자찬이 아닌, 타인 앞에서 흐트러져 약점을 보이기 싫어하는 뿌리 깊은 습관이 베어있는 객관적인 평가였다고 단언할 수 있다— 모습에 부산을 떠는 이런 행위는 추태라고 불러도 걸맞을 것이어서, 작은 한숨을 흘리며 마지막으로 핏빛처럼 붉고 농익은 사과 한 알을 제대로 챙겼는지 확인하며 성역 안으로 발걸음을 내디딘다.
몇 초. 그 찰나의 시간 사이에 시야가 흐려지고 주위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는다. 마치 묵직한 바람이 온몸을 구석구석 훑는 것도 모자라 폐부까지 침범했다 나오는 감각. 이건 아무리 신성력이 높다 하더라도 평범한 인간이라면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요컨대, 허락인 것이다.
주신의 손에서 빚어지지 않은 너란 존재라 할지라도, 이 요람의 주인 되는 이가 이 성스러운 곳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한다고.
이 역시 이전의 자신이었다면 —아, 이걸 봐라. 또 말을 시작하며 이전의 자신이라고 서두를 붙이지 않던가— 신이란 작자들은 왜 다들 이다지도 오만하고 인간의 감정 따위는 고려조차 하지 않는지 뻔뻔하게 따지고 들었겠지. 그렇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는다. 그리고 매우 우습게도, 그럴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이곳은 그의 요람이자 무덤이었을 곳. 한낱 필멸자는 감히 숨 한 모금조차 허락되지 않는 곳에서 그가 자신을 들여보내 준다는 것을 일일히 따지고 든다면 그것은 일종의 만용이겠지.
달리 말하자면 이것은 신인 그가 한낱 외부인인 자신을 봐주고 있다는 것이고.
...또한 다른 의미로도 "봐주고" 있단 뜻이고.
목까지 올라온 웃음을 참는다. 이런 점까지 포함해서 일종의 희열을 느끼는 점까지 자신이 단단히 일그러져있다는 것을 자각한다. 하지만 어쩌겠나, 사랑이란 사람을 변하게 하지 않던가.
"...그래도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보통 시간에 맞추어 성소에 들어올 때면 그는 늘 있는 자리에 중력을 거스른 채로 살짝 땅에서 뜬 상태로 차분히 자신을 맞아준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다던가, 별다른 일은 없었느냐던가. 그러니까, 으레 하는 그런 인사들. 그런 그에게 사과 한 알을 내밀고 농담 같은 인삿말을 건낸다. 그것이 이제 자신이 강박적으로 깔끔하게 다림질한 옷들처럼 그 둘에게는 매년 당연한 일, 이었는데.
멀리서부터 이쪽을 향하던 시선이 오늘은 반대를 향해있다. 한 점의 더러움이나 먼지와도 이제 닿을 일이 없을 것 같았던 그의 옷자락도 땅을 쓸며 바닥에 끌린 채로 그는 무릎을 꿇고, 두 눈을 감고 양손을 모은 채 가만히 있었다. 아, 알고 있지. 이 행동의 의미가 무엇인지 전생에서도 지긋지긋하게 겪었고, 이 세계에서도 성직자들이 보이던 행위를.
그는— 아튼 시미니의 첫 번째 검이자 장자인 이는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목격한 광경에 어쩌면 헛바람이 새어 나오는 소리를 내었던 것 같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고. 짜증? 그래, 짜증도 조금 나기도 하고. 가슴께가 욱신거리는 것이 비단 흉터만의 일은 아닌 것에, 전생의 트라우마라는 것은 참으로 지긋지긋한 악연이라는 걸 깨달으며 —이 역시 이런 방식으로 깨닫고 싶었던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만— 한 걸음, 한 걸음 그에게 천천히 나아갔다.
평소처럼 놀리듯 그를 쿡 찔러볼까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 엄숙하게 기도를 올리는 그의 집중력을 깨트리고 싶다... 라는 기특한 생각은 아니었다. 그가 언제쯤 자신을 알아챌지에 대한 짓궂은 호기심. 그리고 터무니없게도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고 있을 행동을 하는 그의 이 모습만큼은 그렇게 싫지 않았던 것이다.
아, 이것으로 앞서 생각했던 사랑은 사람을 변하게 만든다는 것은 확실하게 헛소리라는 걸 깨닫는다.
사랑은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서야 기도를 올리는 그의 모습마저 이렇게 사랑스럽게 보일 리가 없지.
변함없이 무릎을 꿇고 눈을 감고 있는 그의 앞에 서서, 잠시 고민하다 그의 머리카락 위에 손을 올린다. 전생의 누군가 본다면 마치 악마가 천사에게 축복을 내리는 것 같은 모양새에 거품을 물고 쓰러졌겠지만, 지금은 그런 성경의 천사나 악마 같은 신화를 알고 있는 이는 이곳에 없다. 그 점이 조금 아쉬워서, 조심히 그의 곱슬곱슬한 금색 머리카락을 쓸어주면 침묵만이 가라앉았던 성소에서 낮은 목소리가 울린다.
"오셨군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한 확신이 서린 말투다. 자신이 그에게 하는 모든 행동들을 신의 시야로 보고 있었음에도 지금까지의 행동을 묵인한 것이 그의 배려라는 듯한 모순됨이 느껴지기까지 하는, 그러한 말투.
이전 생에서 신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목소리가 어떨지 상상해 본적이 한때는 제게도 있었다. 다정하고 상냥한, 모든 것을 포용하는 듯한 목소리일 것이라고. 허나 그의 목소리는 그러한 것과는 다르다. 마치 검이라는 그의 본분을 나타내듯 단단한 심지가 느껴지고, 몇 번이고 상처가 나고 깨져도 부러지지만은 않은 단단한 주신의 검. 깊고 낮은, 울림이 있는— 그리고 몇 번이라도 되풀어 듣고 싶은 목소리.
아, 그리고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눈을 뜬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을 머금은 듯한 두 눈은 흔들림이 없으며, 그 오랜 세월을 묵묵히 담아낸 것을 숨기지 않는다. 한 때에는 방황하고 고통받았을 것이 분명한 눈의 색채에는 이제 흐림이 없다. 그가 믿고 지켜보았을 세계를 도륙 낼 뻔했던 이를 보는 눈은 잠시 모든 것을 가늠하며 심판하듯 시야에 담다, 그 눈가의 끄트머리가 미세하게 휜다. 분노 같은 것이 아닌, 순수한 반가움과 조금의 장난기를 담은 채로.
...잠깐. 장난기?
아. 이런.
"가만히 지켜보시는 취미가 있으실 줄이야..."
"너무 빤히 봤으려나? 우리 자기야가 너무 예뻐서 그랬으니 봐줘?"
순간 얼굴에 홀렸다고는 말 못 하지. 그가 기도를 하는 것을 방해하지도 않고 머리를 쓸어주는 것에만 집중했다는 것이 얼굴에 홀려서였다는 걸 인정하는 순간, 이 승패는 졌다고밖에 할 수 없다. 건수를 잡았다는 듯이 놀려댈 것이 뻔한 미래에 빠르게 대응을 해보지만 이미 조금 말려들었다는 것이 확실히 느껴진다. 그래도 되도않는 농이나 던지며 아직도 그의 머리 위에 가볍게 올려져 있는 손을 어찌 뗄지 고민하던 중, 그에게서 들려온 말은 또 생각지도 못한 것이어서.
"이렇게 된 김에 정말 축복을 내려주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못 들은 거로 할까?"
웃으면서 '나름 진지한 말입니다만', 하는 그의 목소리는 실로 가벼우면서도 진심이 담겨있었다. 축복이라. 기도문이든 축복이든 이제 자신에게는 연관이 없는 무가치한 것들이다. 신의 부름을 갈구하면 돌아오는 것은 무응답일 뿐이고, 신을 향한 믿음은 불길로 그를 태웠으니. 지금 이 순간에도 온몸을 이따금 불사르는 그 욱신거리는 고통을 그가 모르는 것도 아닐진대,
"진지한 것은 아니어도 됩니다. 그냥 좋은 말씀이어도 되고."
"오, 대충 적당한 덕담도 된다는 소리 같은데."
"하하. 그것이 편하시다면요. ...저를 봐서라도?"
저도 모르게 앓는 듯한 곡소리를 낼 뻔한 것을 참는다. 얼굴을 살짝 올려다보며 사르르 미소 짓는 모습이 태양의 현신인 것 마냥 눈이 멀 것처럼 아름다움을 느껴버리는 건 콩깍지만은 아닐 터. 잘 생겼다는 것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적확하게 쓰는 모습이 실로 두렵기 짝이 없다. 분명 과거에는 무뚝뚝한 게 이런 일과는 절대 연관이 없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능글맞아졌는지. ...내 탓도 조금 있던가? 그렇게 따지고 보면 입이 백 개여도 할 말이 없군.
"그래, 입이 백 개라면 하나 정도는 좋은 소리를 해줄 수도 있는 거지."
잠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그의 머리카락을 토닥여주며 혼잣말이라고 싱긋 웃다가 목을 가다듬는다. 일전에는 한 단어도 빠지지 않고 외어댔던 그 문구들. 아, 뇌에 인두처럼 찍힌 그 문장들이 자신의 분노와 증오에도 꿋꿋이 존재감을 자리를 잡고 있으니 오랜 습관이란 참으로 무서운 일이지. 그리고 수백 번을 넘어 수천 번을 읊었던 것 중 자신이 그에게 해주기로 결정한 문구는—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손가락 사이사이를 빠져나오는 모래알처럼 부드럽게 흘러나오는 금발을 만지작거리다 못내 아쉬운 듯 놓는다. 비유한 모래알로 가득 찬 사막 위의 낙타가 바늘구멍을 넘는 것보다 힘든 것이 부자가 천국에 발을 디디는 것보다 어려운 일일지니. 그의 아름다운 금발에 머무르다가는 진정한 아름다움을 놓치는 것이지, 찰나에 머무른다면 영원한 영광에 이르지 못 한다고 하지 않던가.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그리고 머리카락에 머물렀던 손을 그의 뺨으로 옮겨 다정히 쓸어내린다. 포갠 제 손에 퍼지는 단단하면서도 딱딱하지만은 않은 부드러움. 그리고 이 따스한 온기는 온전히 그의 배려다. 자신이 그리도 혐오하는 신이, 굳이 인간의 체온을 흉내 내고 있다는 것. 검처럼 싸늘하지도 않고, 태양처럼 강렬하지도 않으며. 다정한 봄날의 햇살처럼 묵묵히 그 자리에서, 그저 차분하게—
—...그러니, 이렇게나 상냥한 그를 어찌 두려워할까.
비록 누군가 그것이 신인 그의 변덕일 뿐이라 말할지언정, 그 시선이 오롯이 저에게만 향한다는 것에서 오는 충족감이 있다. 일찍이 멸절해야 했을 악의 근원을 감내하고 있는 그가 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사랑일까.
어루만지던 하얀 뺨을 엄지 손가락을 쓸어내리다 고개를 살짝 숙인다. 입을 맞출 것처럼 그의 입가에 가까이, 하지만 닿지는 않는 채로.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아낌없이 받았던 사랑을, 이번에는 그에게 속삭인다.
산들바람보다 더 작은 속삭임이었지만 그가 듣지 못할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모든 것을 보고 들을 수 있는 이였으며, 이어질 자신의 행동에도 그는 침묵할 터이니. 입술을 포개는 작은 소리가 오롯이 둘의 사이에서 간질이듯이 퍼져나간다. 두려움이 없이 사랑을 하라— 그 성경의 말씀을 신을 저버린 자신이 이제야 참되게 이해할 줄은 몰랐지만, 사랑이란 원래 사람을 바꾸는 게 아니던가?